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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승

Vol.237 2019년 09월호 조계종 원로의원 암도스님과의 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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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10-02 09:15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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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의 달인, 현대판 부루나존자

조계종 원로의원 암도스님과의 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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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연傘壽宴을 넘긴 암도스님(마하무량사 회주)에게서 가장 친숙하게 듣게 되는 말은 잘 사는 법이다. 바르게 잘 사는 법, 멋지게 잘 사는 법, 더불어 이쁘게 잘 사는 법, 복스럽게 잘 사는 법, 잘 먹고 잘 사는 법 등 그렇게 스님은 최근 설파하신 법문을 예로 들어가며 기본에 충실한 바른 인성의 삶을 당부하고 있었다.

 

전남 담양 남산리 소재 마하무량사는 지난 20085월 암도스님이 삼존불을 봉안하고 개원을 한 도량이다.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며 스님은 손수 풀을 뽑고 삽질을 하며 마하무량사를 견고한 도량으로 일궈냈다. 세수 여든을 넘긴 노구임에도 스님은 여전히 전국으로 법문을 하러 다니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설법제일의 존자이시다.

 

1972년 총무원 감찰국장을 시작으로 종회 사무국장, 총무부장, 상임포교사를 거치며 중앙종무기관 소임을 섭렵했고 다시 포교원장, 교육원장을 역임하며 종단의 중책을 고루 경험한 스님에게는 내면을 성숙시켜준 몇 가지 기준이 있다. 삼법인, 사성제 그리고 연기사상을 근본으로 여기며 불교의 근본진리를 불교신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승가로서의 역할 하나가 그것이며 불성이 곧 인성이라는 바른 이치를 펴고자 하는 일이 그것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겠으나 하나씩 예를 들어가며 들려주는 스님의 법담에는 특별한 향기가 있다. 내로라하는 어른 스님들이 뿜어내는 위엄이나 근엄한 모습과는 달리 스님은 만면에 자비를 머금은 어버이 모습이다. 그러하니 공양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차담을 권하는 자리에서도 세간의 어른이 갖춘 어른상과 출세간의 승려가 갖춘 승가상 두 가지를 고루 보여주며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삶을 몸소 실천하는 스승의 표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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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1938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형제 많은 가난한 집안의 맏이였던 탓에 스님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신문배달을 하며 생활해야 했다. 그러던 중 정광중학교에 입학을 했고 고승들을 다룬 책을 접하며 불교에 눈을 떴다. 그러던 차, 백양사 스님들과 인연이 닿아 출가로의 길을 택하게 되는데 지금 나이로 치자면 고등학교 2학년쯤이던 해, 백양사의 서옹스님 상좌로 출가승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내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는 주변의 충언에 따라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인연이란 결국 지어놓은 업력의 소산이 분명했다. 스님은 가정형편에 곤란을 겪으며 다시 입산을 결정하게 되는데, 내용적으로는 출가였으나 외형적으로는 공무원시험 공부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서게 된 셈인데 그것이 영원한 출가사문의 길을 걷게 한 정식 출가가 되었던 것이다.

 

서옹스님과의 인연 외에 다른 두 분의 은사를 더 만났던 것도 스님이 지어놓은 은사 인연이었겠으나 결국 스님은 다시 백양사의 대중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시절 인연은 탁월한 삶의 운영자를 그냥 두지 않았다. 종단의 일을 맡게 되는 인연이 찾아온 것이다. 그리하여 총무원 감찰국장으로 종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며 종무행정을 경험하는데 그런 일련의 소임이야말로 주머니 속의 송곳이 드러난 형국이었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동국대에 진학하여 철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게 되니 종단의 중책이 맡겨지는 일은 정해진 수순이었고 그 길은 순조롭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종단활동은 순일한 날들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구·대처 분규로 한창이던 때, 스님은 대처승 측에서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오랜 시간을 두고 지탄받는 기록이 되었고 백양사를 종단에 등록하는 공로가 있었음에도 후일, 백양사 방장 추대에서도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으니 세상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새삼 재론되는 이유이다.

 

언젠가 사석에서 스님은 이런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 “비구·대처간의 분쟁으로 낮이면 각자의 위치에서 업무를 봤고 밤이면 상대편 스님들과 마주 앉아 불교의 미래를 염려하는 시간을 갖곤 했지. 참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겠지만 그 당시 스님들에게는 뭐니 뭐니 해도 불교가 우선이었어. 그랬으니 포교사단을 만들어 활동하던 초기에도 활동기금이 부족하여 손을 내밀면 이념을 앞세우지 않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활동기금을 주고받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지. 지금 생각해도 참 아름다운 시간이었어.”라며 포교에 물꼬를 터 준 당시의 도반들을 하나 둘거명하며 옛 일을 회상하기도 하였다.

 

스님이 현대판 부루나존자로 별칭이 붙은 데는 장소와 거리를 가리지 않고 생활법문을 능수능란하게 펼친 까닭이다. 그렇다고 하여 불교기본을 도외시 한 생활법문만을 좇지 않는다. 스님은 법상이 펼쳐진 곳에 따라, 모여든 청중의 근기에 맞는 대기설법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것이 철학과 불교학을 넘나들며 탁마의 시간을 보낸 원력이 꽃을 피운 결과였다.

스님은 팔순을 넘긴 노구에도 강원도가 되었건 경상권이 되었건 시간이 허락되는 범위 내에서 법문에 응한다. 그랬으니 모름지기 6천 몇 백회의 법문을 기록할법 하며 그때마다 스님이 몰고 다니는 불자들의 무리도 한 때는 구름과 같았다는 것이 근거리에서 스님을 모신 분들의 소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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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스님은 본지에 2년 여에 걸쳐 잘 사는 법이라는 주제로 연재를 한 이력이 있다. 글의 핵심은 인성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내용이었는데 원고를 보내거나 책이 도착했을 때, 스님은 예의 따뜻한 음성으로 전화를 해 와, 편집진을 격려하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그럴 때 마다 스님의 마지막 인사는 고마워였다.

한참 어린 우리세대를 향해, 역할론과 책임론 대신 그렇게 가장 흔히 주신 말씀이 고마워라는 마음을 담은 인사이셨으니 자비문중의 스님으로서 성정이 가늠되는 대목이다.

 

얼마 전, 스님을 뵈러 갔던 날, 스님은 찻잔 가득 맑은 차를 내려주시며 당부했다. “바른 생각을 갖고 살아야 해. 재가불자는 물론이고, 승가는 더더욱 정법에 의지해 살아야 해. 승려들이 너무 부자야. 승려가 돈을 알고, 행정이나 사찰운영에 관여하게 되면 수행과는 영영 멀어져. 가난해야 공부가 돼. 그래야 한국불교가 다시 설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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