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이데아] 그 누군가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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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36 2019년 08월호 [교실이데아] 그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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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08-16 16:0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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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방학 무렵 오후였다
. 동료가 교장실에서 호출 전화가 왔다고 알렸다. 교장실로 오라는 말만 들으면 무슨 일이지?’ 하며 절로 불안해진다. 더구나 요즘 학교는 교장실로 수시로 민원전화가 날아든다. 교장은 민원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자면 민원전화 당사자를 불러야 한다. 그 당사자가 된 것일까? 마음 한 구석으로 묵직한 쇠공이 날아든 것 같았다.

 

23학년실에서 1층 교장실로 향했다. 교장실까지 칠십 걸음이면 닿는 거리다. 냉기가 쌓인 복도를 몸을 움츠리며 걸었다. 발에 돌절구라도 매단 것처럼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다.

무슨 일로 교장이 호출하지?’

민원 당사자가 될 만한 일은 없었는지 그날 점심시간부터 더듬어 나갔다. 식수대 근처에 여학생들이 몰려 있을 땐 몸이 부딪치지 않도록 권투 선수처럼 양팔을 얼굴로 모으고 다시 어깨 위까지 올리고 걸었다. 오전 수업 시간에 무한정 심기를 건드리는 학생에게 한없는 인내력으로 대응했다. 민원 당사자로 몰릴 일이 없었다.

 

그 전날 일을 되새겼다. 청소 시간에는 화장실 간다는 핑계 대고 청소에 불참한 학생들을 보고도 못 본 척 했다. 점심시간에는 복도 벤치에 앉아 볼에 볼을 대고 애정표현에 몰입한 남녀 학생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 전날에도 민원의 당사자가 될 만한 일은 없었다.

그러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수업 시간에 무심코 한 말이 학생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조회나 종례 시간에 한 농담에 불편을 호소하는 학생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교장실 앞에 닿았다. 칠천 걸음을 걸은 것 같았다. 출입문은 단호해 보였다. 숨을 깊이 들여 마셨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교장실에 머리를 들이밀며 교장 얼굴부터 살폈다. 교장이 웃으며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민원 당사자는 아니란 말인데. 그렇다고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여기로 앉으세요.”

무슨 일이신지……?”

무슨 일이긴요. 2019년 교육정책사업 학교자율선택 항목 사업서가 있어요

교장이 생소한 용어를 말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교장이 관련 공문을 탁자 위에 펼쳤다. 공문을 집어 들고 읽어나갔다. 사업 항목을 보니 삶을 가꾸는 독서와 토론, 글쓰기가 나왔다. 세부 사업에 학생 인문 글쓰기란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공문을 읽고 나자 대충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도교육청에서 사업비가 내려왔고, 누군가 그 업무를 맡아야 한다. 교장은 내가 그 누군가가 돼 주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고 부른 것이구먼.’

교장의 표정을 살폈다. 그 누군가를 찾느라 고심한 것 같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교장은 필자의 대답을 듣자 얼굴이 밝아졌다.

교장실을 나왔다.

 

23학년실로 오는 동안 누구나 꺼리는 그 누군가를 왜 한다고 했지? 뭔가 씌었던 것만 같았다. 교직 사회에서 누군가가 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데 말이다. 그 누군가가 된 교사에게 특별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법적으로 정해진 업무 외에 덤으로 하는 업무라 그렇다.

별도의 시간을 내야 한다. 그 누군가가 되기를 꺼렸던 동료들이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예산을 집행하다 보면 학교 관리자들과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학생들과 함께 진행해야 한다. 사정을 안다고 학생들이 호응하는 것도 아니다. 학생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 누군가가 된 교사는 마음 상하기 마련이다. 혼자만 마음이 급해지곤 한다. 상급 기관에서 예산을 받았으니 어쨌든 결과물은 만들어내야 하니까 그렇다.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부담감에 짓눌린다.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그 누군가를 자처했다니 스스로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3학년실 출입문을 열었다.

천장 냉온풍기에서 내려오는 열기를 맞으니 긴장했던 몸이 풀렸다. 그러자 그 누군가가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민원 당사자가 되지 않은 사실에 안도한 나머지 그 누군가를 벌컥 삼켰다.

 

상급기관에서 내려온 사업은 쓸모가 없기만 할까?

학생들에게 필요한 일이다. 학생들이 정규 교육과정에서 배우는 교과 중 국어를 예로 들겠다. 정규 국어 수업은 학생과 교사가 함께 교과서에 나온 논설문, 설명문, , 소설, 희곡, 수필 들을 읽는 시간이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그런 글을 잘 읽는 방법을 가르친다. 학생들에게 작가들이 쓴 글을 맛보는 방법을 가르친다고도 볼 수 있다. 체육수업 시간에 축구를 배웠다고 축구 기술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듯 국어 시간에 시 한편 감상했다고 시를 잘 쓸 수 없는 노릇이다. 소설 한 편 읽었다고 소설을 쓸 수 없다. 정규 국어 수업만으로는 학생들이 시와 소설을 맛보는 단계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런데 상급 기관에서 내려오는 업무는 정규 국어 수업과는 다른 면이 있다. 학생들을 맛보는 대상에서 맛을 창조하는 주체로 성장시킬 수 있는 매력이 있다. 글쓰기도 연습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진도를 머리에 이고 있는 정규 수업 시간에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글쓰기 연습도 처음엔 혼자 하기 어렵다. 동아리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훈련하면 효율적이다. 부원들과 함께 기운을 모으면 포기하려는 마음도 줄어든다.

나를 이기는 힘도 얻을 수 있다. 자의든 혹은 그 누군가가 된 동아리 지도교사라도 있으면 금상첨화다. 지금은 유명 작가가 된 사람들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된 뒤 3월은 오고야 말았다.

학생 인문 글쓰기 동아리부터 만들어야 했다. 부원 모집 홍보물부터 만들어 붙였다. 부처님 가피 덕분인지 열세 명이 지원했다. 지원한 학생들은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 쓰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학생들도 고전을 읽고 최소 A4 용지 다섯 장이 넘는 긴 서평을 쓰자.” 하니 우리가 어떻게 긴 글을 쓸 수 있겠어요.” 하고 볼멘소리를 했다.

3, 4월 책을 읽게 하고 5월부터 서평을 쓰라고 했다. 7월 중순까지 다섯 번 이상 고쳐 쓰게 했다. 학생들은 힘들어 하면서도 잘 따라왔다. 두 명이 포기했다. 열한 명이 긴 서평을 써냈다.

여름 방학하는 날 출판사로 원고를 보냈다.

책 제목은 세상으로 딛는 나의 첫발자국이다. 작가를 꿈꾸는 학생들이 세상을 향해 디딘 첫걸음이 모인 것이라 그렇게 지었다.

 

816일 개학날 책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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