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원의 세계여행] 베를린? 베를린... 베를린! 세가지 이야기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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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35 2019년 07월호 [정진원의 세계여행] 베를린? 베를린... 베를린! 세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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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07-23 09:5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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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 하면 웬지 나는 지금 베를린으로 간다라는 영화제목 패러디로 떠오르는 도시. 1991년 여름, 1994년 겨울 그리고 2019년 여름의 베를린이 줄지어 달려온다. 1989년 인도로 시작한 세계여행이 이듬해 타이완 일주를 거쳐 1991년 본격 유럽 자동차여행을 감행하게 된 것도 영화제목이 연상되는 또 하나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베를린?

 

첫 번째 베를린에서 생각나는 것은 베를린 자유대학’, 첫 글자를 따서 하데카HDK’라고 부르던 그 대학에 다니던 두 한국인 유학생을 만난 일이다. 우연히 만나 비좁은 기숙사에서 우리 일행 네 명이 구겨져 자던 기억과 그 중 한 남학생이 베를린 장벽의 낙서를 열심히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동·서독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너도 나도 사진을 찍던 일, 2차대전 폭격에 부숴지다 만 카이저 빌헬름교회가 랜드마크처럼 서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길디 긴 베를린장벽의 그림과 낙서들을 땡볕에 찬찬히 둘러보며 마음에 드는 것들을 찍던 일, 그리고 한국유학생들의 애환과 우리 사회를 서유럽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배운 여행이었다. 우리의 자동차 여행이 부러운 두 남학생들은 따라가고 싶지만 유학 중 과목 당 낙제를 연거푸 두 번하게 되면 추방된다며, 한 번씩 과락이 있던 터라 거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동양에 대한 무시와 1980년 광주의거에 대한 서유럽의 시각, 또 동백림 간첩단 사건의 윤이상 등에 대한 독일의 관점에서의 이해 등 그 당시에는 한국에서 듣고 보던 견해와는 사뭇 다른 시각들을 처음 접했다. 결국 2006년 진실규명위원회에서 동백림 사건은 간첩죄 등을 무리하게 적용했다고 인정하였다. 정치에 무심했던 내 젊은 시절, 나는 동백림이 동베를린을 음차한 것임을 모르고 무슨 동백꽃이 많이 핀 곳인 줄만 알았다.

특히 한국은 독일에 상대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주로 돼지머리 놓고 고사지내거나 보신탕이야기 등 미개하거나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쳐져 그런 방송을 한 다음날이면 학생들의 시선이나 질문이 부담스러워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토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부유함과 쾌적함, 학비가 없는 유학생제도 등이 크게 부러웠던 첫 번째 베를린!

 

베를린?

 

두 번째 1994년 베를린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잠들었다가 기차 승무원들에게 전재산을 다 털리고 영혼까지 털린 상태로 도착했었다. 분실물을 신고하려고 만난 베를린 역무원 할아버지. 내가 일행과 둘이서 6인용 컴파트먼트에서 자다가 지갑, 카메라, 여권, 항공권, 여행에서 사 모은 터키 은제품 등 값나가는 소지품을 몽땅 잃어버렸다고, 언어도 잘 안 통하고 아직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정신도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더듬더듬 그 사연을 하소연했다. 그후 20년 가까이 폴란드를 혼자서는 가지 못 할 정도로 트라우마가 컸다. 여권과 항공권은 다행히 기차 화장실 휴지통에서 찾았는데 여행을 하기 위한 경비와 소지품을 다 잃어버렸다고 울먹거리니 따뜻한 목소리로 괜찮아, 걱정하지마하였다. 순간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는데 정말 괜찮아지고 무언가 다 해결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아무 것도 찾지 못했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이었다. 당시 1990년대 초 공산권이던 동유럽 체제가 붕괴된 직후라 상대적으로 지독히 가난하던 동유럽 사람들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사람들에게 거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두 사람이 그토록 속수무책으로 다 도둑을 맞을 동안 깨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나중에서야 컷, , 컷으로 떠올랐다. 서너명의 승무원이 우리 객실에 와서 뒤지는 장면들. 베를린 숙소에서 연사흘 사시나무 떨듯 오한에 시달리며 앓아누웠다가 발견한 손등에 시퍼런 멍자국. 나는 아마 강도로 돌변한 기차승무원들에게 수면 마취주사를 맞았던 모양이다. 그것도 치사량에 가깝게. ‘아 이렇게 객사를 하는구나!’ 진심으로 생각하며 경련을 일으키고 오들오들 떨었던 무서운 기억. 다행히 동행인 선배는 별 탈이 없어 나를 지극정성 간호해 주어 몸을 추스르자마자 여행 다 접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누가 외국에 간다면 온 식구가 배웅하고 마중하던 시절. 그만큼 외국에 가는 일이 드문 때였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나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죽어도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돌아왔다. 다시는 외국에 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웬걸, 마중나온 엄마를 보자마자 서른다섯의 어린? 딸은 수도꼭지 고장난 것처럼 엄마 나 죽을 뻔했어. 글쎄 이렇고 저렇고쉴 새 없이 나도 모르게 살아 돌아온 오딧세이를 주워 섬기고 있었다. 나에게 두 번째 베를린이란 구사일생의 따듯하고 커다란 위로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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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2019년 여름 세 번째로 방문한 베를린은 내가 이름을 지어주고 딸처럼 생각하는 내 첫 조카 해담이가 그림공부를 하는 곳이다. 격세지감. 본래 목적인 리투아니아 학회로 직행하지 않고 베를린을 베이스캠프로 삼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유럽 출발 직전 나는 또 생애 두 번째로 119타고 복통으로 응급실을 다녀오는 상황이 발생, 가야할까 말아야할까를 가는 날까지 고민하다 그래도 베를린 보호자를 믿고 떠난 길이었다. 갓 태어났을 때 햇님처럼 방긋거려 해를 담은아기였던 해담이가 어느새 다 커서 이모를 마중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카톡문자에는 이모 밥은 해놨는데 죽을 끓일까요였다. 감동. 그리고 34일 해담이표 베를린 투어가 시작되었으니.

 

샤를로텐 구역에 사는 조카는 랜드마크 여행을 베를린 따라 흐르는 슈프레강 유람선으로 시작하였다. 내가 외국에 가서 배를 타고 구경한 것은 덴마크 코펜하겐의 늬하운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곳은 항구 도시여서 당연시 했는데 베를린 강을 따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왕복하며 이쪽저쪽에서 바라보는 베를린 대성당과 베를린 방송탑, 시청 청사 등은 꽤 멋진 풍광과 유유자적을 선물받은 기분이었다. 이제부터 여행을 하면서 배를 탈 수 있는 한, 배로 그 도시의 윤곽을 조망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유람선 투어였다. 그동안 왜 그리 돈을 아끼겠다는 일념으로만 여행을 했는지 안타까울 때가 많았다.

 

처음 인도여행에서는 풍부하고 지천인 과일들을 하나도 못 사먹고 원숭이바나나만 먹다가 오질 않나, 세느강 유람선도, 런던의 랜드마크 런던 아이도. 돌아와서 땅을 치게 된 사연이 많고도 많다. 늘 여행자는 볼 것은 많고 여비는 쪼들리고 해서 유명한 곳에 가서 입장료가 비싸 발길을 돌리던 경우도 허다하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곳을 가기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행기표, 기차표,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지금보다 젊은 날의 경험과 추억을. 그러니 이 글을 읽는 그대여. 부디 여행에 돈을 아끼지 마시라. 법정스님께 직접들은 명언이 있다. ‘일상은 검소하게 여행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라.’

 

베를린 페르가몬박물관

 

베를린의 샤를로텐 여름궁전도 이번에 처음 가봤다. 특히 중국 도자기가 가득찬 궁전이 놀라웠다. 2차대전의 폭격으로 부숴진 채로 명물이 된 카이저 빌헬름교회도 여전히 건재해 반가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페르가몬박물관은 압권이었다. 터키의 페르가몬 유적을 통째로 뜯어서 박물관을 만든 그 실력보다 망해가는 나라의 무관심을 틈타 허가 절차를 밟았다손 치더라도 통 큰 도둑질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1994년 겨울 베를린에 앞서 페르가몬을 가게 되었다. 정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이름뿐인 페허의 고대유적지. 그러다 우연히 베를린 시내를 걷다가 페르가몬이라 쓴 박물관을 들어갔더니 페르가몬이 고스란히 거기에 남아있었다.

 

페르가몬은 현재 터키 이즈미르지역 베르가마라고 불리는 마을인데 고대 그리스의 도시였다.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281기원전 133년 동안에 아탈로스 왕조가 다스린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이들은 이곳을 그리스 세계의 주요 문화적 중심지 중 한 곳으로 탈바꿈 시켰다. 독일은 19세기 말 오스만투르크 측의 허가 아래 박물관 전시 유물을 옮겨왔는데 페르가몬 제단을 포함한 이들 유적은 고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던 페르가몬의 다양한 문화상을 보여준다.

나는 특히 이슈타르문이 마음에 들어서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었다. 바빌론 신화에 등장하는 이슈타르에게 헌정하는 이 문은 채유벽돌에 부조로 유니콘 같은 동물들이 멋지게 장식되어 있다. 본래 바빌론 성벽의 부분이었다고 한다. 그 정교한 벽돌인지 타일인지에 부조를 새겨넣은 짙푸른 색의 웅장한 문이라니 눈으로 목도하지 않으면 그 느낌을 알 수 없다. 유니콘 동물문양은 살아있는 것 같다.

 

세 번의 베를린 여행을 통하여 나의 30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첫 번째 막 통일된 독일의 낯선 풍광, 그리고 동유럽의 각박함을 위로해 주던 두 번째 베를린의 기억을 넘어, 세 번째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즐길 수 있게 된 베를린 유람선과 추억여행. 어쩌면 내 인생도 삼십대 초반엔 낯선 세상 호기심으로 두리번거리다가 잠자다 뒷통수도 세게 맞고 그렇게 사십대 오십대를 통과하며 걸어왔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국화 옆에서를 읊조리는 여행기를 쓰게 됐는지도. 여행은 공간과 시간을 통과하며 발효, 숙성을 있는 그대로 음미하게 하는 질좋은 와인같은 것임을 베를린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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