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직과 업] 군인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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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34 2019년 06월호 [영화 속의 직과 업]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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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07-19 10:04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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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대에서 위문편지를 처음 받은 날이 기억난다. 여고생들이 예쁜 편지지에 정성스러운 글씨로 써서 보낸 편지는 병장들이 다 가져가고, 이등병인 나에겐 인천 사는 남자 중학생의 편지가 할당되었다. 삐뚤빼뚤 글씨는 되게 못 썼지만 내용은 예의 발랐는데, 마지막 구절을 읽고 숨이 턱 막혔다. <저도 나중에 자라면 형님처럼 용감한 군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때 나는 어떤 답장을 썼던가? 생각해보면 나의 답은 살면서 왔다 갔다 했다. 형편이 좀 나은 시절엔 <당연히 가야지>였고, 또래들보다 처진다고 느껴지는 날엔 <무조건 빼야지>였다. 군대를 면제받은 친구들이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고시에 합격하여 양복을 입은 것을 볼 땐, 내가 강원도 들판에서 보낸 24개월이 인생에 엄청난 마이너스로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군대 경험의 득실을 계산할 때마다 기꺼이 플러스인 것이 하나 있다. 군대에 다녀오자 전쟁 영화들이 달리 보였다. 군대에 가기 전엔 전쟁 영화들이 보여주는 볼거리에 끌렸다. 거대한 스케일, 긴장 넘치는 전투 액션, 다양한 무기 구경 등. 하지만 제대한 후엔 영화 속에 나오는 군인들의 처지에 마음이 갔다. 적 앞에서 탄약이 떨어진 병사의 막막함, 상관에게 무리한 명령을 받은 장교의 고독, 튼튼한 군화 한 짝을 얻기 위해 부패한 관료들과 싸워야 하는 하사관, 모두 나의 일처럼 느껴졌다. 가짜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달까. 전쟁영화를 보는 나만의 기준이 생겼다. 감독이 무기회사의 사장이라도 된 것처럼 살상의 쾌감에 집중하는 영화들보단 병사의 땀과 눈물에 주목하는 영화들에 끌린다. 보이며 거꾸로 나를 위로했다. “분필밥 먹은 지 이제 겨우 20. 10년쯤 더 먹으면 뭘 좀 알 수 있겠지.”

 

2>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부터 얘기하자. 이 영화 속 군인들은 내가 경험한 군대와 가장비슷하다. M16소총부터 수통까지 영화 속 병사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내가 사용한 것과 똑같았다. 전투보다 삽을 들고 땅을 파는 작업이 더 많은 것이나, 소대원들의 관계와 정서도 비슷했다. 요컨대 그들은 나의 보병소대 선배님들인 것이다.

징병제는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는 약점이 있는데, 군인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군인이 된다는 점이다. 모병제는 이런 가능성이 훨씬 줄어든다. 군대와 맞지 않는 사람들은 복무 중에는 고문관으로 불리며 조롱당하고, 제대 후에는 정신적인 후유증을 겪으며 고생한다. 이제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말이 많이 알려졌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월남전 참전군인들은 이런 병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다쳤고 망가진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이경영은 이 망가진 군인을 대단히 섬세하게 표현한다. 보통 PTSD를 앓는 군인들을 떠올리면, 충혈된 눈으로 사람을 쏘아보거나, 술에 취해 주먹을 휘두르며, 아무한테나 욕설을 내뱉는 사람이 생각난다. 하지만 이경영은 그렇게 연기하지 않는다. 그는 이 망가진 군인을 평소엔 공손하고 섬세하며 잘 웃는 사람으로 연기한다. 다만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할 뿐이다. 그러다 어떤 심리적 방아쇠가 당겨지면 자기파괴적 행동을 한다. 이경영이 연기하는 군인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이경영은 아픈 병사가 가장 약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섬세한 청년이었고, 가장 무능한 사람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가장 큰 책임감을 가진 남자란 것을 가르쳐준다. 정말 영원히 잊지 못할 명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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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화에 나오는 군인들은 자주 PTSD를 앓는다. 왜 그럴까? 그건 전쟁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경험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살생은 무리고, 마음의 어딘가를 망가뜨린다. PTSD를 앓는 사람이 나오는 영화 중 오래 기억에 남았던 영화들을 두편 더 소개하고 싶다.

이스라엘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의 감독은 1982년에 군인으로 레바논 공격에 참여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군인 시절을 떠올리면 아무런 기억을 못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감독은 사라진 기억을 찾기 위해 전우들을 찾아가는데, 오랫만에 만난 전우들은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리거나, 감독처럼 기억을 못 한다. 감독은 만남을 계속 늘려가고, 결국 자신이 봉인한 기억의 실체에 점점 다가간다.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인데 색감과 동작이 몽환적이다. 꿈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 기억을 찾는 여정에 잘 어울린다. 영화는 엔딩에 이르러 갑자기 실사로 넘어가는데, 감독이 잃어버렸던 기억의 실체가 나타난다. 이때 큰 충격을 받았다.

 

토미 리 존스와 베네시오 델 토로가 주연한 <헌티드>는 군대시절 사제관계를 맺은 두 전직군인의 추격액션처럼 홍보되었지만, 사실 이 영화는 PTSD를 꽤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베네시오가 연기한 군인은 1999년 코소보 전쟁에 참여한 후, 서서히 PTSD에 잠식된다. 훈장까지 받은 우수한 군인이었지만 나중엔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망가진다. 베네시오가 자신의 상관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있다. <교관님. 당신이 훈련시킨 사람들이 나를 죽이러 왔는데, 그들은 군인이 아닌 것 같아요. 그들은 로봇같아요.>

로봇이라. 어쩌면 가장 완벽한 군인이란 로봇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 없이, 생각 없이, 고통 없이, 반항 없이, 주어진 명령에 따르는 군인. 메카닉적인 기능도 과학의 도움을 받아 완벽하다. 로봇 군인에게 PTSD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영화로 만든 감독이 있다. <터미네이터>의 제임스 캐머런이 그 사람이다.

 

그는 데뷔작 <터미네이터>에서 인간 대 로봇의 전쟁을 그리는데 실상은 군인 대군인의 대결이라 볼 수 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연기한 T-800은 기계문명이 보낸 군인이고, 마이클 빈이 연기한 카일도 인간저항군이 보낸 군인이기 때문이다. 캐머런 감독은 이 영화 외에도 자신의 영화에서 군인을 즐겨 주인공으로 삼는다. 전설적인 흥행작 <아바타>의 주인공은 상이군인이고, 멋진 우주 활극 <에이리언2>의 주인공들도 미래의 해병대원들이다.

캐머런 감독이 군인을 그리는 방식은 특별하다. 양쪽으로 달려가는 주장들을 한군데에 모으는 느낌이랄까. 우선 그는 군인들이 사는 공간, 설비, 무기, 탈것 등을 세심하게 공들여서 묘사한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장비들이 우리가 아는 과학 너머의 지식으로 만들어진 별종이라 느껴진다면, 캐머런 감독의 영화 속 장비들은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친숙하다. 디자인은 기능에 충실하여 투박하고, 곳곳에 서 매일 갈고 닦는 정비병들의 노고가 느껴진다.

 

또한 캐머런은 군인 사회의 갈등과 동지애도 잘 포착한다. 경험이 적은 장교와 베테랑 병사들의 충돌이라던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보여주는 군인들만의 직선적인 대화묘사도 꼼꼼하다. 디테일한 묘사가 빛나는 장면이 많은데, 가령 이런 것이다. <에이리언2>에서 해병대원들이 탄 수송선이 낯선 행성으로 급강하할 때의 일이다. 덜컥덜컥 요동치는 수송선 안의 모두가 긴장하는 가운데, 테베랑 힉스 상병은 편안하게 잠자고 있다. 하사관은 짜증 난다는 듯 도착하기 전에 저 자식 좀 깨우라고 호통친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인물들이 먼 미래의 해병대가 아니라 현실적인 군인으로 느껴졌다.

한편 캐머런은 이렇게 애정을 갖고 그린 군인들의 본질에 숨어있는 폭력성을 잊지 않는다. 군인은 결국 생명을 부수고 죽이는 일을 해야 한다. <아바타>에서 생명의 나무를 파괴하는 군인들을 볼 때, 마음이 처량했다.

결국 이상적인 군인이란 감정과 생각이 없는 로봇인걸까? 하지만 캐머런은 군인이 어떤 상황일 때 멋있어지는지 알고 있다. <터미네이터2>에서 T-800은 인간 동료들과 어울리며 살상의 규칙을 다시 학습하고, 눈앞에 나타난 적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엔딩에선 자신을 믿어준 소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용광로에 들어간다. <에이리언2>에서 해병대원은 우주최강의 전투생명체 위협 앞에서 시민을 보호하다 죽어간다. <아바타>에선 주인공들을 아예 항명자들로 만든다. 주인공 일행은 생명을 파괴하는 호전론자들에 맞서 약자들을 위한 전투에 나선다.

 

4>

지난 2월 한 영국인 할아버지가 부산 유엔묘지에 묻혔다. 윌리엄 스피크먼 씨는 24살 때 한국전에 참전했었고, 전투에서 동료 대부분을 잃고 자신도 부상당했다. 미국이 전사자의 유해를 본토로 데려오는 걸 원칙으로 하는 것과 반대로, 영국은 전사한 땅에 그대로 매장한다. 그래서 유엔묘지에는 영연방 국가들의 유해가 가장 많다. 오래전 죽은 동료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윌리엄 씨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다만, 그분의 선택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함께 싸웠던 인간들 사이에서 생기는 연대의식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밴드오브브라더스, 형제애, 전우애라 불린다.

 

군인이 나오는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알맹이는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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