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에 취하다]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 중 <그대의 찬 손>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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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34 2019년 06월호 [그 노래에 취하다]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 중 <그대의 찬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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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06-26 10:3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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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하고싶더라도제발오해말아요.

시인도시 먹지않고밥먹고살아요.

시인도시 입지않고옷입고살아요.

시인도돈벌기위해일도하고출근도하고돈없으면라면먹어요.

오해하고싶더라도제발오해말아요.

오해하고싶으면제발오해해줘요.

시인도밥만먹고는못살아요.

시인도마누라만으로는못살아요.

구경만하고는만족못해요.

그러니까시인도무슨짓을해야지요.

무슨짓을하긴하는데그게좀그래요.

정치는정치가들이더좋아하고

사기는사기꾼들이더좋아하고

밀수는밀수업자들이더잘하고

작당은꾼들이더잘하고

시인은시를더좋아하니까

시에미치지요밥만먹고못사니까

밥안먹고못사는이야기에미쳤지요....”

 

오규원 <시인 구보씨의 일일> 중에서

 

 

<바보들의 행진> + <기쁜 우리 젊은 날>

 

옛 친구들을 만나 밤늦도록 수다를 떨다가 돌아왔다. 1980년대 그 막막한 시절에 어쩌자고 철학과에 입학해 버린 친구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술을 마시거나 산을 오르는 게 전부이던 친구들. 그 시절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고지식했다. 모름지기 철학자나 시인이나 음악가라는, 순수하고 고귀한 것을 탐하는 자들은 현재의 물질적 이익에 연연하거나 막막한 미래를 걱정하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호기롭고 치기 어리던 시절. 우리는 스스로 시대의 반골이자 보헤미안이라 여겼고 그 힘으로 살았던 것 같다.

 

우리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1838년 파리에도 그런 청춘들이 살고 있었다. 로돌포, 콜리네, 쇼나르, 마르첼로라는 친구들의 직업은 각각 시인, 철학자, 음악가, 화가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지리 궁상일 수밖에 없는 처지이지만 자존심만큼은 하늘을 찌른다. 소설가 앙리 뮈르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 <보헤미안의 생활 풍경>이라는 작품을 발표했고, 이 소설을 토대로 자코모 푸치니가 오페라를 만들었으니 그 오페라가 바로 <라보엠>이다.

 

라보엠’(La Boh è me)은 집시풍으로 사는 사람들을 은유적으로 일컫는 단어다. 원래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유랑민족인 집시가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보헤미안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집시를 상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단어는 속물이나 기성세대에 대비되는 단어로 정착된다. 사회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예술가, 문학가,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원작자인 앙리 뮈르제는 책 속에서 보헤미안에 대해 이렇게 써놓았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의 길에 들어서는 자로서, 예술 이외에 생활 수단이 없는 자는 보헤미안이라는 좁은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예술가라는 평가를 받은 그 시대의 예술가는 대부분 보헤미안이었다.”

 

그래서 이 오페라에는 벨리니의 <노르마>나 베르디의 <오텔로>처럼 특별한 영웅도 없고 악당도 나오지 않는다. 치정과 배신과 탐욕으로 죽고 죽이는 드라마가 아니라 믿는 것이라고는 문학과 예술밖에 없는 가난한 청춘들의 일상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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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쇠와 촛불이 만들어내는 사랑가

 

파리 라탱 지역의 싸구려 방에 네 명의 친구들이 세 들어 살고 있다. 겨울이 되었는데 방세는 밀리고 난로에 넣을 땔감마저 다 떨어졌다. 너무 추운 나머지 시인인 친구가 자신이 쓰고 있던 원고 뭉치까지 태워보지만 역부족이다. 그때 음악하는 친구가 레슨비를 벌었다며 신이 나서 들어온다. 어라, 돈이 생겼네, 집세는 무슨 집세, 술이나 마시러 가자! 너무나도 익숙한 청춘의 공식을 따라 그들은 술을 마시러 카페 모뮈스로 간다.

 

시인 로돌포는 원고를 끝내고 가기 위해 잠시 남는데, 그때 운명적인 노크 소리가 들린다. 옆집에 사는 미미가 열쇠를 떨어트렸는데, 촛불이 없어서 찾을 수 없기에 문을 두드린 것이다. “촛불 좀 빌려주세요.” 이 대목에서부터 오페라는 보헤미안의 삶에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소재인 사랑 이야기로 넘어간다. 촛불 하나로 시작되는 노래는 오페라 역사를 찬란하게 밝히는 불빛이 된다.

 

로돌포는 미미와 함께 캄캄한 방을 더듬다가 열쇠를 찾아내지만,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고는 계속 찾는 척한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손이 맞닿는다. 로돌포는 미미의 손이 너무 차다면서 그 손을 잡고 녹여 주겠다고 한다. 이런 식의 구도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너무나도 구태의연한 설정이지만, 푸치니 당시의 오페라 세계에선 획기적이었다.

 

오페라의 무대가 신화나 전설의 영웅담에서 서민들의 구질구질한 일상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런 시각을 베리스모라고 하는데, 19세기 후반에 마스카니, 레온카발로 등으로 시작하는 이탈리아 사실주의 오페라의 흐름을 말한다.

, 이제 손을 잡았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로돌포는 미미의 손을 잡고 자기소개를 한다. “내가 누구냐고요? 나는 시인이에요. 뭘 하냐고요? 시를 쓰지요. 어떻게 사냐고요?

 

그냥 살아요.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백만장자랍니다.”라고 허세를 떨며 그동안 옆집의 미미를 생각해왔던 마음을 고백한다.

내 마음의 금고에 간직해온 꿈들이 당신의 두 눈 때문에 모두 날아가 버렸지만 대신 그곳에 달콤한 희망이 자리 잡았다는 식의 유치 발랄한 수작질을 한다. 만일 이것이 연극의 대사였다면 형편없는 장면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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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어설픈 고백은 대사가 아니라 노래다. 그것도 막강한 오케스트라가 뒷받침하고 있는 푸치니의 노래다. 그 찬란한 음악의 힘 때문에 청중은 꼼짝할 수가 없다. 유치한 신파조의 노랫말은 마치 오래된 풍경화처럼 향기를 내뿜기 시작한다. 몽롱하게 시작된 노래는 점점 격렬해지다가 막강한 고음으로 두 사람의 마음에 불을 당긴다. ‘희망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라 스페란차’(la speranza)를 부르는 순간 테너의 음역은 하이 C음을 치고 올라가야 한다. 그 고역의 음을 수행해내면 두 사람의 눈은 정말이지 달콤한 희망으로 빛나게 된다.

이 노래에 이어서 미미의 답가가 나오고, 두 사람이 같이 사랑의 찬가를 부르면서 오페라의 1막이 끝난다.

 

불행히도 이 아름다운 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현실 앞에서 보헤미안은 무력해지기 일쑤다. 로돌포는 사랑하는 여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자신의 가난한 신세에 낙담하여 미미를 떠나보내고, 마음을 크게 다친 미미는 병든 몸을 전전하다가 죽기 전에 친구들을 찾아간다. 그녀는 손이 너무 시리다고 말한다. 로돌포가 손을 잡아주자 미미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순간을 회상한다.

이젠 말해도 되겠네요. 당신이 이미 열쇠를 찾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손이 따뜻해지는 걸 느낀다면서 영원한 잠 속으로 빠져든다.

미미의 죽음으로 청춘의 시대는 끝난다. 보헤미안의 치기와 순수는 끝나고 그들 역시 기성세대로 진입한다. 젊은 날의 이야기들은 결코 돌아갈 수 없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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