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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32 2019년 04월호 [영화 속의 직과 업]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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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04-29 17:05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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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하나에 환호하고 별 하나에 한숨짓는 직업이 있다.

영화인들이 그렇다. 모든 영화는 개봉 전에 기자시사회를 열고, 기자들의 별점평가와 함께 관객에게 공개된다. 백전노장의 영화인들도 별점평가가 담긴 영화잡지를 처음 펼칠 때만은 마치 성적표를 받아든 중학생처럼 긴장한다. 영화를 별로 평가하겠다는 생각은 미국 사람들이 처음 했고, 우리나라에선 영화평론가 정영일 선생이 처음 실시했다. 그런데 영화보다 먼저 별로 평가를 받았던 직업이 있으니 그게 바로 이번 달에 이야기할 요리사다.

 

<더 셰프>(Burnt)의 브래들리 쿠퍼는 영화 내내 초조해 보인다. 그는 미쉐린 가이드에서 별 두 개를 받은 일류 요리사지만, 말에 날이 서 있고, 사람들을 깔봐서 사방에 적이다. 자주 폭음을 하고 엉망이 되며, 정기적으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하지만 의사조차 귀찮아한다. 무엇이 이 젊고 재능있는 요리사를 이렇게 만드는가? 모든 건 그에게 별이 하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엔 별 세 개를 받아 최고의 요리사가 되겠다는 생각만 꽉 차 있다.

 

타이어를 만드는 기업, 미쉐린에서 맛집 가이드북을 처음 발간한 것은 1900. 무려 119년 전이다. 처음에는 서비스로 배포하는 무가지였다고 한다. 오늘날 미쉐린 가이드는 거대한 산업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신뢰받는 식당 소개지여서, 유럽의 경우 미쉐린의 별을 받은 요리사에겐 금융이 따라붙는다. 은행들이 서로 대출해주겠다며 요리사를 찾아온다. 그러나 평점이 떨어지면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유럽 최고의 요리사들이 부담감에 자살했다는 뉴스가 들려올 때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은행원들이 먼저 떠오른다.

 

현대의 요리사들이 엮여있는 분야는 금융만이 아니다. 요즘 TV를 켜면 늘 누군가 음식을 먹고 있다. 요리는 방송과 인터넷의 가장 방대한 콘텐츠가 되었다. 요리사는 장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경영학자이고, 상권 분석하는 부동산 전문가이기도 하다. 요리를 건강과 섞어 이야기할 땐 의사가 되고, 외국의 요리 문화를 소개하며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식당을 찍어줄 땐 여행작가가 된다. 이 흐름 속에서 스타 요리사들이 탄생했다. 그들은 배우나 가수처럼 매니저를 두고 스케줄을 관리하고, 주방이 아니라 방송국 스튜디오로 출근한다.

영화계는 부와 명예가 보장된 일류 요리사의 세계를 즐겨 다룬다. 이미 별을 딴 요리사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별이 없는 요리사들은 인정을 받기 위해 요리한다. 존파브로 감독의 <아메리칸 셰프>는 시종일관 웃으며 볼 수 있는 코미디이지만, 주인공 요리사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는 한때 업계에서 주목받는 신인 요리사였지만, 경력이 쌓이면서 일종의 슬럼프에 빠져있다. 그는 독창적인 메뉴를 개발하여 다시 한번 모두를 놀라게 하고 싶지만, 식당 사장은 운영 면에서 새로운 메뉴보단 잘 팔리는 메뉴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수백만의 팔로워를 가진 유명한 음식 평론가는 신랄한 독설로 그의 요리를 비난한다. “실망이다. 그가 뚱뚱해진 이유는 손님들이 먹지 않아 부엌으로 되돌려지는 모든 요리를 그가 먹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정도 독설을 들으면 누구나 화가 날 것이다. 주연과 감독을 겸한 존 파브로는 사람들에게 <아이언맨>의 비서 겸 운전사로 유명하지만, 그는 미국 독립영화계에서 오랫동안 작품을 만들어온 감독이다. <아메리칸 셰프>의 요리사 캐릭터에선 그의 실제 영화 인생이 겹쳐 보인다. 특히 망친 음식을 손님들에게 그대로 내려는 어린 아들을 혼내며 하는 말은 이 남자가 힘겨웠던 무명시절을 어떻게 견뎠는지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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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요리사 영화에서 즐겨 악당으로 출연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음식평론가다. <더 셰프>의 브래들리 쿠퍼를 낙마시킨 것도 음식 평론가인데, 그 까다롭고 위협적인 역할을 우마 서먼이 연기했다. 이 영화에서 요리사와 평론가가 만나는 장면은 총이 있다면 서로를 쏠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른다. 이것은 극영화들의 과장일까? 꼭 그렇진 않다. 실제도 허구만큼 거친 세계이다.

기자의 정신을 가지고 카메라를 주방으로 가져간 요리 다큐멘터리영화들이 있다. <노마/뉴 노르딕 퀴진의 비밀>은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별 두 개의 식당을 4년간 취재했다. 유럽의 미식 세계에서 변방 취급을 받던 덴마크의 요리사 르네 레드제피가 <노마>라는 식당을 만들어 전 세계에서 가장 예약이 어려운 식당으로 만든 이야기다. 하얀 접시 위에 색감이 풍부한 음식 재료들을 물감처럼 사용하여 플레이팅하는 요리사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있는 장소는 주방이 아니라 반도체 공장 같다. 메뉴 개발을 놓고 난상토론을 벌이고, 밤을 새워가며 테스트 요리를 만들고 시식하는 요리사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

이 영화를 보면서는 <노마>같은 레스토랑이 부산에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마>의 모든 메뉴는 코펜하겐 근교의 농가에서 재배한 재료만 사용하며 철에 따라 새로 짜는 제철 음식이다. 부산은 요리 면에서 은근히 무시당하는 변방이지만, 사실 채소와 해산물 등이 풍부한 곳으로 미식 도시로서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별을 딴 요리사들 이야기를 한 편만 더 보자. 헬렌 미렌이 주연한 <로맨틱 레시피><백 걸음의 여행>이란 소설이 원작이다. 미쉐린으로부터 별 1개를 받은 프랑스 레스토랑과 바로 앞에 새로 생긴 인도 음식점의 이야기다. 두 가게 사이는 백 걸음 정도 떨어져있는데, 영화의 시작 때는 멀었으나, 영화가 끝날 때쯤엔 가까워진다.

헬렌 미렌은 오래된 프랑스 레스토랑의 오너이다. 그녀는 죽은 남편이 온갖 고생을 하며 만든 레스토랑의 격을 유지하기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테이블보를 가는 동작 하나에도 품위가 있고, 주방을 점검할 때는 군대를 시찰하는 장군처럼 엄격하다. 그런데 영화 내내 차갑게 보였던 그녀가 소녀처럼 속내를 드러내는 장면이 딱 하나 있었다. 이 장면에서 헬렌 미렌이 놀라웠던 것은 가장 기쁜 순간을 표현하는데, 평생 짊어지고 산 부담감이 함께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연기가 가능할까 감탄이 나온다.

 

미쉐린은 1년마다 식당의 평가를 갱신한다. 그들의 평가기준에 인테리어는 없는 대신(그래서 노점음식이 뽑힐 때도 있다) 음식이 계속 같은 수준으로 나오는지는 중요하게 본다. 미쉐린 별점평가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미쉐린의 평가단은 손님처럼 몰래 와서 그해의 메뉴를 심사한다. 그리고 평가의 결과를 전화로 알려준다. 1개에서 별 2개로 승격한 소식을 듣는 순간을 연기하는 헬렌 미렌을 꼭 보시길 바란다.

 

한편 영화 속 요리사들이 모두 극심한 경쟁 속에 사는 것은 아니다. 회계장부나 별점평가와 상관없이 한 끼의 식사가 주는 위안을 이야기하는 영화들도 있다. 일본영화 <심야식당>이 대표적이다. 원작만화가 아베 다로는 마흔이 넘어 데뷔한 작가로, 특유의 느긋한 템포로 도쿄 뒷골목의 작은 식당에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소리소문없이 인기를 끈 만화는 드라마로 먼저 만들어졌고, 영화로 뮤지컬로 계속 변주됐다.

심야식당의 위치가 흥미롭다. 도쿄 신주쿠구 하나조노. 이 동네는 술집과 파칭코가게, 스트립바와 클럽 등 밤샘영업을 하는 가게들이 많다. 그래서 <심야식당>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밤새 일하는 사람들, 막차를 놓친 학생들, 회식에서 떨어져나온 직장인들, 이웃 가게 주인들 같은 이들이다. 영화는 요리라기 보단 요기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음식들이 나오고, 손님들은 무뚝뚝한 주인장이 준 음식을 먹고 마음의 허기를 채운다.

그리고보면 일본영화들은 <위안의 음식>이란 테마를 잘 구현하는 것 같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카모메 식당>은 핀란드의 작은 음식점 이야기고, 나카타니 미키와 후지 타츠야 주연의 <행복의 향기>는 바닷가 중국음식점 이야기다. <, 단팥 인생 이야기> <우동>도 맛있는 식사를 하는 기분으로 즐겁게 본 영화들이다. 어깨가 축 처지는 날에는 이런 영화를 보면서 힘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나는 위안을 주는 요리라는 테마에서 약간 호들갑을 느낀다. 요리는 요리일 뿐이고, 미식이나 위안보다는 끼니의 세계가 더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식사는 하루에도 몇번씩 일처럼 모두를 찾아온다. 죽지 않기 위해 우리는 먹는다. 거기에는 미식이나 위안을 넘어서는 일상의 위대함이 있다.

여기서 나의 생각은 스님들의 식사하시는 모습으로 간다. 한국불교는 매일 돌아오는 끼니에 섬세하게 조율된 공양의식을 접목시켜 식사시간을 가장 중요한 수행찬스로 만들었다. 발우공양시 외우는 오관계는 정신이 번쩍 드는 명문이다. 이 미식과 스타요리사들의 시대에 흐릿해진 식사의 의미를 상기시켜준다.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고 /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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